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화단 운동 (문단 편집) === 전쟁의 종결 === 결국 청 정부는 전쟁에서 대패하여 화친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열강들은 의화단에 의해 희생된 외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배상할 것과 의화단과 의화단과 관련된 관리들의 처벌 및 진압 등을 요구했고 청 정부는 그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의화단]]을 묵인하고 지원해 준 산동순무 육현(毓賢)은 처형되었으며 의화단을 지지했던 재의(아이신기오로 자이의)는 황족임을 고려하여 아들 [[부준]]과 함께 서북 [[신강]]으로 추방되었다. 특히, 독일의 외교관이 사망한 것 때문에 광서제의 이복동생으로 훗날 [[선통제]]의 생부가 되는 [[순친왕]]이 직접 [[독일 제국|독일]]까지가서 [[빌헬름 2세]]에게 사죄해야 했다. 순친왕은 황제의 동생 자격으로 파견된 것인데 본래 독일은 [[삼배구고두]]로 [[독일 제국]] [[황제]]에게 예를 표하라고 했지만 청측의 로비로 다른 사죄 표현으로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열강은 '''[[신축조약]]'''(베이징 의정서)을 체결해 [[중국]]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키고 철도를 장악했으며 많은 영토와 이권을 받아냈고 [[서태후]]는 [[의화단]]에게 [[토사구팽|패배의 책임을 다 뒤집어씌워]] [[숙청]]하였다. 8개국 연합군은 대승을 거뒀지만 내부에서는 잡음이 있었다. 이전부터 러시아의 계속된 세력 확장은 영국 등 다른 나라에게 위협으로 다가왔고 전쟁 동안에도 이러한 문제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러시아군은 이 시기 만주에 출병하여 만주 일대를 점령하고 극동총독부를 설치하여 100,000명이 넘는 병력을 배치해 일본에게 불안감을 심어줬다. [[신축조약]]의 청나라측 전권대사 [[이홍장]]과 청황실이 러시아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러시아군의 만주 주둔을 사실상 묵인했다. 더 나아가서 연해주처럼 '''흑룡강성 및 하얼빈의 북만주, 위구르, 내외몽골을 전부 병탄하여 송화강-고비사막을 러시아-청의 경계 '''로 삼으려고 했으며 이는 [[러일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일본]]은 의화단 운동을 빌미로 복건성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하문 침공 사태'''를 일으켰지만 서양 열강들이 단칼에 거절함으로 인해서 중국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는 실패했는데 당시 일본의 실력을 보고 1901년 영국과 공식적으로 동맹을 체결하여 '''서양 열강의 주구, 극동의 헌병, 제2의 식민제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에 일본은 복건성 대신 [[대한제국]]을 완전히 병합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을 어떻게 점령할까를 놓고 왈가왈부가 많았다. 대한제국의 전략적 이점상 대한제국에 일본의 이권이 관철되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일본에서 이견이 없었으나 식민지화 또는 보호국화, 친일 정부 수립 등 여러가지 안을 두고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 병합만 해도 대한제국에 자체 의회와 전주 이씨 왕실을 두고 독일 제국-여러 영방국가들의 모델을 따르는 방식 등이 논의되기도 했고 [[이토 히로부미]]처럼 보호국화를 주장하는 인사도 있었으며 [[야마가타 아리토모]]처럼 대한제국 황실을 폐지하고 단순한 식민지로 만들자는 주장까지 여러 주장이 병립했다. 결론적으로 [[왕공족|대한제국 황실을 우대하지만]] [[일제강점기|조선은 식민지로 병탄하는 것]]으로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